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후 전국 군현(州.府.郡,顯)의 이름(名號)을 개명(改名)하고 새로운 지배세력을 구축할 때 개국(開國)과 통일에 협력한 공신(功臣)들에게 군·현의 토성(土姓 '支配姓)으로 분정(分定)하였는데 그때 신라의 순화군(淳化郡)을 순창군(淳昌郡)으로 고치고 토성에 조씨(趙氏)외에 4개 성(姓)을 분정하였다. 토성분정(土姓分定)은 고려때에 제도적으로 모든 성씨의 근거지(貫籍地)를 정한 것이니 곧 순창조씨가 순창에 본관을 사관(賜貫 :임금이 내려준 본관) 받은 것이다. 고려때 토성에 분정된 성씨는 일부 사성(賜姓)된 성씨를 제외하고 고구려, 신라말기의 호족(豪族)으로 그 이전에 이미 씨족(氏族)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 씨족의 거주지를 지금의 본관처럼 호칭(呼精)하여 씨족을 분별하여 왔는데 고려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착한 것이 오늘의 본관(本貫)이다.
순창조씨는 씨족의 원류(源流)에 대해서 스스로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른 본관에서는 순창조씨를 포함하여 중국에서 동쪽으로 와서 그 후 손대(後孫代)에서 분관(分貫)하였다는 설(說)을 네세우고 있으나 고려초 이후의 선대(先代) 계도(系圖)와 영고성쇠(榮枯盛衰)도 밝히지 못하면서 그 이전의 원류를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족(姓族)은 전해오는 최선대(最先代)의 문헌이 있어 고려중기 이전 선대의 계도(系圖)나 유사(遺事)를 추심(推尋)하지 못한다. 고려사에 잇는 전(傳)이 있는 경우에는 그래도 다행이다. 특히 고려 중기 이전의 벌족 (閥族) 일수록 선계(先系)를 밝히지 못하여 동성동본의 별파(別派)가 있으니 순창조씨 도 그중의 하나다. 문헌비고(文獻備考) 씨족편이나 조선씨족통보에서 순창조씨는 조염 (趙廉)파, 조원길(趙元吉)파, 조영숙(趙永叔)파의 삼계파(三系派)가 있다고 기록 하고 있으나 그 이외에 또 조공탁(趙公卓)계가 있으니 4계파(4系派)가 있는 것이다. 나라의 흥망과 왕위 계승에 따른 갈등 및 집권 세력(權臣)간의 반목 등 수많은 정난(政亂)과 전쟁(戰爭)을 거처오떤사 씨족의 운명성쇠가 자잤으니 종족(宗族)의 분산(分散)과 부침은 말할나위 없다. 고려때 토성분정 후 왕조(王朝)의 정책에 따라 군현(郡縣)의 토성은 상경종사(上京從仕)한 사족(士族)과 토착향리(士着鄕里)인 이족(吏族)으로 분화(分化)되었고 세(勢)의 성쇠(盛衰)에 따라 상경과 낙향(落鄕)이 있었으니 순창군의 토성(土姓)이며 호족(豪族)인 조씨의 선대(先代)도 그러하였다.
오늘에 전해오는 순창조씨의 선세(先世)에 관한 종외(宗外)의 문헌에서 고려말(高麗末) 이전시대의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최고(最古)의 연대(年代)가 예부상서(禮部尙書) 조영숙(趙永叔)인데 순창설씨보(淳昌薛氏譜)에서 인종(仁宗 1123-1145)에 설자승(薛子升)의 처부(妻父:장인)이니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58) 이전인 숙종(肅宗) 예종(睿宗)때(1096-1122)의 인물이다. 그 다음은 무신정권 이후의 인물로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이곡(李穀)이 1344년에 쓴 요동군(遙東君) 조공탁(趙公卓 :고종 42년에서 숙종6년 1255-1319)의 비문이 있고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충숙왕(忠肅王 :復位 1332-1339)때 재신(宰臣 : 元나라 順帝때 太醫院使) 조분(趙芽 : 趙公卓 長男)과 충혜왕(忠惠王 :復位 1340-1344)에 밀직부사(密直副使) 조염(趙廉)과 그 아들 상주판관(尙州判官) 조진(趙縉 :공민왕(恭愍王 10년(136B))과 우왕(禑王) 14년(1388)때 부원군(府院君) 조원길(趙元吉) 등이 있어 그분들의 시대적 정황(政況)으로 보아 유사(遺事)를 살펴볼수 있으나 상관계보(相關系譜)와 그 선대(先代)는 현존한 사료만으로는 추심하기 어렵고 영숙(永叔)과 공탁 (公卓)의 후손도 알지 못한다. 다만 세칭(世稱) 오종(吾宗)의 사세조(4世祖)인 휘 원길(諱 元吉)계를 호남파(湖南派). 휘 염(諱 廉)계를 호서파(湖西派)라 일컫는 두 종파(宗派)만 각기 시대(時代)와 명휘(名諱)를 달리한 시조(始祖 : 一世)를 모시고 대(代)를 이어오고 있다.
우리의본관
우리의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하는 내력은 위에서 밝혀진 역사적 사실과 선계삼세(先系三世)와 충헌공(元자吉자) 선조의 출자지(出自地)가 순창이었으므로 1702년 처음으로 발간(發刊)한 시보(始譜)에 관(貫)은 순창(淳昌:舊號玉川也)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래(以來) 본관을 「순창」으로 하였다. 그러나 본관(本貫) 순창(淳昌)으로 하여 6차에 걸쳐 대동보를 수보(修譜)하였는데 188년이 지난 1890년에 간행한 경인보(庚寅譜)에서 보첩의 표제만 옥천(玉川)으로 바꾸어 썼을 뿐 그 이유도 밝히지 않았고 더욱이 개칭에 따른 조정 (朝庭)의 재가(裁可)도 받은 바 없는데 오늘날 많은 종인(宗人)들이 「옥천」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原來) 본관은 그 시조(始祖)의 출자지(出自地)의 법정군명(法定郡名)인데 「순창」은 1000 여년을 내려오는 군명이며 「옥천」은 고대(古代)에 순창의 별호(別號)로 사용하였다고는 하나 고려사와 조선세종실록(世宗實 錄) 지지(地誌)에서 「옥천」과 오산(烏山)은 「순창』의 별호(別號)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며, 또 「옥천』은 전라북도 용담현(龍潭縣)의 별호로도 쓰였고 강원도 우계현(羽溪縣)의 아호(雅號)라고도 적혀 있어 「옥천」이라고 할 때 어느 지명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관호(貫號)는 법정지명의 군성(郡姓)이냐 면촌(面村)의 임내성(任內姓)이냐를 가름하여 그 가문(家門)의 격(格)의 높낮이로 구분하였는 바 종통성(宗統性)과 법통(法統)을 확보하는 가의 여부로 판단되므로 우리의 본관(本貫)은 선조(先祖)의 계통(系統)을 이어 받은 「순창」이다.
순창은 본래 백제 도실군(道實郡)이요 한편으로는 오산(烏山)이라 이르며 옥천(玉川)은 신라 순화군(淳化郡)의 별호이다. 고려때 지금 이름한 순창현(淳昌順)은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고 명종 5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숙왕 원년(忠肅王 元年)에 나라를 통일하고 정년방으로 고을을 승격시켜서 군(郡)이 되었다. 이조때에 지금 이름으로 군수를 두었으며 동(東)으로 남원경계 21리에 이르고 남(南)으로는 옥과경제 18리에 이르며 서(西)로는 담양경계 19리에 이르고 북(北)으로는 임실경계 25리에 이른다. 서울라의 거리는 7일 낮이 걸린다.